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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30일
늦은 밤이었다. 아니 이른 새벽이었을지도. 몸은 죽도록 피곤한데 잠을 이루지못하고 무의식의 경계에서 한참을 뒤칙이다 결국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런 경우에는 항상 갈증을 느껴서 물을 마시기 위해 방을 나오는데 거실에 불을 켜고 부엌으로 들어선 순간 기절할 일이 벌어졌다. 상상하기조차 혐오스런 벌레였다. 아니 벌레라기보다는 괴물이었다. 내 허벅지만한 굵기의 돈벌레. 수십개의 마디가 늘어선 회색의 껍데기. 그 마디마디마다 뻗어 나온 희누런 수십쌍의 다리. 머리에서 내려와 바닥에 늘어진 더듬이.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등껍질보다도 훨씬 징그러울 흰 색의 배마저도 금방 뒤집혀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한 움직임.
비몽사몽인 상황이었기에 나는 이것이 순간 꿈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이것이 현실일지라도 그냥 꿈이라고 치부해버리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충제 한 통을 다 뿌리면 죽어버릴까? 아니, 날뛰기 시작하면 어떡하지? 집을 버리고 도망가야하나. 설령 죽었다 쳐도 수습은 어떻게 하지? 대체 어떻게 치워야 하지? 괴물을 본 후 0.1초만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해댄것 같다.
오히려 침착한 쪽은 벌레였다. 거의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듯 하였다. 벌레는 이미 내 의식을 점령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데도 나는 온 몸을 수십개의 발 끝으로 더듬는 듯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건 인과응보야. 그동안 내가 죽인 벌레들의 복수.
허나 내가 벌레를 싫어하는 것이 나의 잘못인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듯이 당연히 싫어하는 것들이 있을 뿐이고 사람인 이상 벌레들과 함께 있기를 싫어할 뿐이지 않은가? 이것은 균형의 일환이다!!!
머리속으로는 이녀석을 해치워야할 분명한 이유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들까지도. 허나 이녀석 역시 내게 끊임없이 반문해왔다. 말로 하지 않고 내 의식에 직접 전하는 반문. 시각으로 촉각으로 극단의 혐오감을 통해 전하는 자신이 죽어야할 당연한 이유에 대한 반문. 촉수가 내 목을, 발가락을, 옆구리를, 겨드랑이를 비비고 찔러가며.
혐오감만으로도 벌레를 해칠 이유는 충분하다. 어느날 무심코 찬장에서 컵을 꺼내 물을 따른 순간 벌레 한마리가 떠올랐다. 수면의 장력으로 다리들이 양쪽으로 쫙 펴진채 뒤집어져 꿈틀거리는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혐오감을 주었다. 몸부림이 점점 줄어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때까지. 이상한 일이지만 생각하기도 싫은 그 광경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가 먹기위해 쥐를 잡는 것이 아니듯이 나 역시 자연스런 행동을 하고 있었다.
벌레를 죽일 이유와 방법들이 늘어갈 수록 불쾌감은 더해져갔다. 다리의 갯수는 하나 둘 늘어가고 껍데기가 검붉고 노란 얼룩무늬로 변하는 것만 같았다. 싱크대 배수구에 걸린 음식찌꺼기같은 눅눅하고 역겨운 느낌이 코로, 입으로, 손 끝으로.
살충제를 뿌리면 엄청난 속도로 기어가다가 마구 꿈틀거리다가 수많은 다리를 쭉 뻗는다. 격렬한 움직임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살충제의 어떤 성분 때문인지 다리들이 몸통에서 떨어져나와 제각각 비틀고 휘젓는다. 이 괴물 또한 그런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은 그냥 살아있는 것보다도 끔찍한 일일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다시 침실로 들어와버린 것은 최대의 실수이다. 이제 나는 방에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벌레의 존재만으로 생겨난 굴레.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해가는 불안함. 불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