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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4일
참으로 의미 깊은 시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수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학생들은 원망만 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도다. 교수님은 그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셨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나 못하는 학생이나 모두에게 동등하게 답을 찍을 기회를 주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전인 교육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의 시험을 통해 전해주고자 하셨던 바는, 사람의 태생에는 귀천이 없고 누구나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순수한 인간애 그 자체가 아닌가!!! 오늘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한낮 종이조각에 불과한 시험 점수로는 학생을 평가할 수 없게 되었고, 열심히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출석 본위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깨달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시장 경쟁 사회에서 서로가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깊이와 거리를 알 수 없는 학습 분량에도 굴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의지하며 정리판을 만들고, 공부를 못한 동료들에게 자신의 필기를 기꺼이 내어주기도 하고 심지어 누가 먼저 부탁할 일도 없이 자신의 필기를 게시판에 올려주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실천적 동기애가 어느덧 우리 몸에 배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성공적인 교육자를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난 십 수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인재 양성과 진정한 전인 교육의 딜레마 속에서 고민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이 두 가치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현실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어느덧 경쟁은 미래를 바라보는 이들의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 되어버렸고, 평등의 이데올로기는 윤리 교과서 안에서 죽어 묻혀버린 추상화가 되어있음 또한 알게 되었다.
한내과 교수님은 엄청난 분량의 숙제를 통해 우리가 스스로 단결하여 실력을 쌓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자신의 인격에 흠을 내면서까지 일부러 예측 불허의 문제들을 출제하여 시험 점수로 학생들을 평가하기를 거부했다. 이 어찌 살신성인의 자세가 아니란 말인가!!
윤내과 교수님은 또 어떠한가. 어차피 못풀 문제들임을 학생들도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교수님은 과대표에게 비밀 엽서를 건네주며 포기하는 학생이 없도록 배려해주셨다. 그리고 이분 또한 시험 점수로 학생들을 평가하기를 거부하셨다. 그리고 출석 본위의 평가, 그때문에 윤내과 교수님이 평소에 그렇게 열심히 출석을 불렀구나!!!
이 쯤에서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이러한 교육자들이 이나라 또 어디에 있겠단 말인가!!! 교수님들은 너무도 치밀했다. 한내과 교수님이 우리에게 삐진 것도, 아니 삐진 척 한 것도, 그리고 절대 혼자서는 밑줄을 그을 수 없던 윤내과 교수님의 빠른 나레이션도, 모두 치밀하게 계획된 교육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오늘의 내과 시험을 통해 우리는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고, 앞으로는 황내과 교수님도 이분들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 후배들 역시 우리처럼 두 마리 토끼를 잡게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예비 수의사들이 학업에 열중하도록 만들어주실 뿐 아니라 동물과 공존하기에 앞서 사람과 공존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교수님들이 있기에 우리 수의학의 미래는 밝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