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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6
    heretic 2020. 12. 2. 07:02

    나는 고교서열이 크지 않던 평준화 세대이다. 내 모교는 심지어 그전까지 후기고였다. 당시 인문계고등학교 학업분위기나 상위권대학 진학률은 대체로 비슷했다. 내 대학동기 중 반정도는 지방출신이었고 특별히 어느지역이나 계층에 치우쳤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러한 환경이 원인이었는지 나는 미래의 교육은 점점더 기회의 평등을 실현해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않았다. 시골아이들이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일찍 집을 떠날 필요가 없는 방향으로 진보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순진하게도. 한편 출신대학으로 사람의 가격을 매기는 저급한 문화현상은 90년대초 '치맛바람' 열풍이 상징하였듯, 어렵고 불행했던 우리 근현대사가 교육계에 지려놓은 피오줌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웬걸, 세월이 갈수록 입시제도는 빈부격차보다도 빠르게 학생들을 위아래로 갈라놓으며 ‘교육’의 정의와 반대방향으로 내달렸다. 외려 '입시' 자체가 교육의 정의가 되었달까.

    ‘교육으로 인격을 함양하고 잠재능력을 일깨우고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고 블라블라...’는 지금와서는 개소리고 차라리 그냥 축산물 등급제도를 보는게 더 적확하다.

    ‘축산물의 품질을 정부가 정한 기준에 따라 차별화하여 소비자에게 구매지표를 제공하고 생산자에게는 좋은 품질의 축산물을 생산하게 하여......’

    축산물->학생, 소비자->대기업, 생산자->학부모로 바꾸면 교육을 제대로 정의할 수 있다.

    옳다할 수도 없지만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건지 궁금하다. 대과 급제하기가 요즘 서울대 가기보다 훨씬 어려웠다는 조선시대부터? 함 알아보자.

    조선시대 교육은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즉 육예(六藝)를 기초로 이루어졌다. 예는 몸과 마음가짐,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승마, 서는 읽고 쓰는 법, 수는 자연과학을 의미한다. 바른 인성을 키우는 것이 으뜸이었고 예술적 감성과 건강한 신체 역시 버금으로 중요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국영수는 되레 맨 뒤에 있는 셈이다. (이과천대는 예나지금이나...)

    특히 음악이 교육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야사에 기록된 성균관 유생 황연용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동재(유생들이 거주하던 기숙사로 동재와 서재가 있다)에서 중광지곡(현악기 위주로 구성된 악곡의 한 형태)을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목록에 두림시어타가 세곡이나 있는걸 보니 대박 잘하나보이.”

    “그도 그렇지만 죄다 수피두매탈이던데 드러머 발재간이 그렇게 좋다던가?”

    “나같은 경우 정상 체력일때 최대속도로 밟으면 16비트로 180bpm을 맞출 수 있다네.”

    “과연 실학자다운 접근이로군! 헌데 나는 다운피킹에 막혀서 마스터오브퍼펫을 2절 중간까지밖에 못하고있네. 해도 늘지를 않으니 참.”

    “팔이 아니라 손목을 이용해야 힘이 덜 든다 들었네. 그런데 자넨 언제까지 다운피킹만 연습할 셈인가. 서재밴드 기타는 벌써 누노베텐코트 태핑도 한다네.”

    “헐 그새끼 일학년때 내가 코드 다 가르쳤는데...”

    “걔네 드러머 작년까지 완전 x밥이었는데...”

    “그래도 짭짭이는 내가 낫지.”

    “나도 림샷은 걔보다 잘해...”

    하여간 그런 시절이 있었더랬다. 우리 모두가 지미헨드릭스였고 존본햄이었었다, 입으로는... 아아 그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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