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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3일
하루를 더 기다리면 비가 올까요. 산산히 부서지는 태양의 조각들, 바람에 날리지 않는 작은 대기의 입자들. 그대 손위로 내려앉아 조그맣게 빛나는 대지의 신수. 나는 결코 비를 맞지 않으려, 하지만 그 비가 좋아 창문을 내었습니다. 내 방엔 옷걸이가 하나 있는데 대개 입지 않는 옷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있고 그 위로는 입는 옷들이 아무렇게나 툭 걸쳐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책상이 있는데 역시나 돌보지 않는 책들이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돈되어있고 시험을 준비할 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습니다. 책상이 기댄 벽에는 이미 죽어버린 꿈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창문 근처엔 다른 이의 꿈들이 역시나 그들의 향수를 전해줍니다. 비가 오지 않았기에 나는 창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만 창문 아래 모니터를 켰습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살아있는 것들로부터 느끼거나 배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실험실에는 사과와 흰쥐가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박제로 만들어 하나하나 살펴보아야했습니다. 나는 방문을 걸어잠그고 언젠가는 천연의 그것도 아니고 박제도 아니게 될 화면 밖의 그들을 주시하며 또한 언젠가는 내 자신과 내가 입은 옷, 입지 않는 옷들과 보지 않는 책들마저 그렇게 될 것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도 같은 불꺼진 방안에 앉아 이미 죽었으나 그 이상의 생명을 얻은 그들이 창, 아니 화면 밖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 내 방 역시 일련의 향수를 건네어줄 정돈된 박제가 되는 것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나는 비가 좋아 창을 내었지만 비는 이미 내 방 안에도 내리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 모습 그대로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