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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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heretic 2009. 6. 22. 22:37
2008-03-21 한동안 비가 와서 시원해지나 싶더니 오늘 다시 찌는 날씨로 되돌아와버렸다. 이런 날 감기에 걸리니 견디기가 쉽지 않다. 얼굴은 화끈거리는데다 코는 막혀서 정신까지 멍해졌다.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서 열을 식혀주면 좋겠건만.... 대기가 마치 점액질로 이루어진 것 같다.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차 한대가 쓰윽 쓸고 지나간 자리를 끈끈한 공기가 쿨럭거리며 메워들어간다. 나는 50여미터를 앞질러 걷고 있었다. 나는 누구로부터? 내가 저만큼 가는데 따라잡을 길이 없다. 따뜻한 젤리가 흐르는 강 속을 헤엄치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 나를 보며 이것은 정말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아니야!" 라고 외친 순간 외쳤던 자신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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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heretic 2009. 6. 22. 22:36
2008-03-21 오늘도 몸이 나른하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까? 창밖은 눈부셨지만 내 방은 결코 환한 적이 없었다. 방 안에는 커다란 바퀴가 하나 있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더 이상 돌 수 없었다. 공기는 건조했고 시간은 무한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멀리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어느 음성 하나도 뚜렷하지가 않았다. 이곳의 나는 지금은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사람은 어느 순간 기억되었다가 조금씩 잊혀져가는 거야. 난 기억되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거겠지. 그래서 사람은 완전하게 사라질 수 없나봐. 너와 내가 닮았다는 것은 내 삶이 나만의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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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heretic 2009. 6. 22. 22:35
2005년 5월 29일 "오랫만이네, 형" "그래 어떻게 지내니?" "나야 뭐 그럭 저럭... 형은 어때? 지금도 신혼부부?" "신혼부부는 무슨.... 내가 왜 너랑 지금 술마시고 있겠냐?" "왜.. 재미 없어?" "넌 지금도 그림 그리나보다. 여전히 재밌냐?" "그림 안그린지 꽤나 됐는걸. 모르겠어.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도. 형은 더이상 안그리나봐?"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 "그럼 그리면 되잖아." "그게 말처럼 안돼. 생활이란 건 나를 변화시킬 수 밖에 없으니까. 나이들어 결혼하고 함께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라. 한번은 니 형수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정말 그림그리는 게 좋다고. 근데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 아니?" "모르지." "니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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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heretic 2009. 6. 22. 22:34
2005년 3월 19일 '몬스터'에서 요한 리베르토는 완전한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기억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버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완전한 죽음도, 완전한 망각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죠. 그토록 냉정하던 그가 떠난 마지막 자리엔 인간적인 자국만이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저 역시 완전한 망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망각이라는 것 또한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내 몸을 구성하는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완전한 상실은 제가 절실히 원하던 것이었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잊고 있었다' 또는 '잊고 있다'는 진행형의 어구가 암시하듯, 망각은 상실이 아니라 기억의 한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에 대한 느낌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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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기억heretic 2009. 6. 22. 22:34
2004년 5월 3일 하루를 더 기다리면 비가 올까요. 산산히 부서지는 태양의 조각들, 바람에 날리지 않는 작은 대기의 입자들. 그대 손위로 내려앉아 조그맣게 빛나는 대지의 신수. 나는 결코 비를 맞지 않으려, 하지만 그 비가 좋아 창문을 내었습니다. 내 방엔 옷걸이가 하나 있는데 대개 입지 않는 옷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있고 그 위로는 입는 옷들이 아무렇게나 툭 걸쳐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책상이 있는데 역시나 돌보지 않는 책들이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돈되어있고 시험을 준비할 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습니다. 책상이 기댄 벽에는 이미 죽어버린 꿈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창문 근처엔 다른 이의 꿈들이 역시나 그들의 향수를 전해줍니다. 비가 오지 않았기에 나는 창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만 창문 아래 모니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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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heretic 2009. 6. 22. 22:33
2004년 1월 30일 늦은 밤이었다. 아니 이른 새벽이었을지도. 몸은 죽도록 피곤한데 잠을 이루지못하고 무의식의 경계에서 한참을 뒤칙이다 결국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런 경우에는 항상 갈증을 느껴서 물을 마시기 위해 방을 나오는데 거실에 불을 켜고 부엌으로 들어선 순간 기절할 일이 벌어졌다. 상상하기조차 혐오스런 벌레였다. 아니 벌레라기보다는 괴물이었다. 내 허벅지만한 굵기의 돈벌레. 수십개의 마디가 늘어선 회색의 껍데기. 그 마디마디마다 뻗어 나온 희누런 수십쌍의 다리. 머리에서 내려와 바닥에 늘어진 더듬이.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등껍질보다도 훨씬 징그러울 흰 색의 배마저도 금방 뒤집혀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한 움직임. 비몽사몽인 상황이었기에 나는 이것이 순간 꿈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이것이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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